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돌파했을 때 주변에서는 위기론이 퍼졌습니다. SNS에는 "이제 한국 경제 끝났다"는 비관론이 가득했고, 실제로 많은 투자자들이 보유 주식을 급하게 정리했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환율 급등기에 막연한 불안감으로 대부분의 종목을 손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오히려 실적이 개선되면서 빠르게 회복했고, 제가 팔았던 가격보다 훨씬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번 환율 상황도 단순히 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구조를 분해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500원 환율은 정말 뉴노멀인가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선 것은 2008년 금융위기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당시 두 차례 모두 금융시스템이 무너지는 시스템 리스크(Systemic Risk)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시스템 리스크란 금융기관 하나의 부실이 연쇄적으로 전체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이나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붕괴 직전인가요? 은행들이 줄줄이 부도나고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국 금융당국은 완화적 통화정책을 이어가고 있고, 국내 은행들의 건전성 지표도 안정적입니다(출처: 금융감독원). "이번에는 다르다"라는 말은 주식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네 단어입니다. 평균값으로 돌아가는 회귀 현상을 무시하고 지금이 뉴노멀이라 착각하면, 낙폭 과대 구간에서 사지 못하고 고점에서 팔게 됩니다. 저는 이번 환율 급등을 과거 금융위기와 같은 수준으로 보지 않습니다. 중국 위안화가 7.2에서 6.85까지 절상되는 동안 우리나라 원화만 약세를 보인 것은, 일본과 함께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자금 유출 압력과 서학개미의 해외투자 증가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설 때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보유하면 손실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과거가 미래를 보장하진 않지만, 구조적으로 수출 기업에 유리한 환경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수출주와 내수주, 명암이 갈린다
환율 상승은 누군가에게는 악재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호재입니다. 원자재를 수입해서 국내 시장에 파는 내수 기업은 원가 부담이 커지지만, 제품을 달러로 받는 수출 기업은 환차익으로 영업이익이 급증합니다. 실제로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코스피는 277까지 추락했지만, 1년 반 만에 1,000을 회복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기 직후 수출 기업들의 실적이 폭발적으로 개선되면서 주가가 V자 반등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제조업 중심 국가이고, 환율이 올라가면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는 구간에서는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에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달러로 매출을 올리는 반도체, 자동차, 전력기기, 2차 전지 같은 섹터가 수혜를 받습니다. 반대로 내수 중심의 유통, 외식, 항공 등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마진이 압박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최근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내수 중에서도 관광 관련 업종은 예외적으로 수혜를 받고 있습니다. 2019년 1,700만 명이던 방한 관광객이 올해는 3,00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관광공사). 중국과 일본 간 한한령 영향으로 한국이 대체 관광지로 부상한 덕분입니다. 이처럼 환율 상승기에도 섹터별로 명암이 갈리기 때문에, 단순히 "시장이 위험하다"라고 전부 정리하는 건 기회를 놓치는 일입니다.
AI 인프라 사이클, 아직 초입이다
지금 글로벌 시장의 핵심 테마는 AI 인프라 사이클입니다. 2000년대 중반 중국 인프라 붐 때 현대중공업이 5년간 35배 상승했던 것처럼, 지금은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인프라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엘론 머스크는 최근 "삼성전자와 TSMC의 파운드리 생산능력(CAPA)으로는 수요를 도저히 맞출 수 없다"라며 직접 반도체 생산 시설을 확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CAPA란 반도체 공장이 일정 기간 동안 생산할 수 있는 최대 물량을 의미합니다. 메모리 반도체와 GPU, ASIC 같은 AI 전용 반도체 수요가 앞으로 3년간 공급을 초과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AI 인프라 사이클의 수혜주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반도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수요 급증으로 수주 잔고가 쌓이고 있습니다
- 전력기기: AI 데이터센터는 전력 소비가 막대해 전력 공급 장치와 변압기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 ESS(에너지저장장치): 발전 용량 부족을 단기간에 해결하기 위해 낮 시간 남는 전력을 저장했다가 피크 시간에 공급하는 ESS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ESS 섹터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형 원전은 짓는 데 12년이 걸리고, SMR(소형모듈원전)도 최소 3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ESS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구축할 수 있고, 유가 변동에 영향을 덜 받기 때문입니다. 태양광이나 풍력은 유가가 떨어지면 투자 매력이 줄지만, ESS는 AI 데이터센터 옆에 필수적으로 설치되기 때문에 수요가 꺾이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산 2차 전지에 대한 미국 정부의 규제가 지속된다면, 한국 기업들의 점유율이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일본, 독일 외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환율 급등과 AI 인프라 사이클이라는 두 가지 흐름을 함께 보면, 지금은 수출 중심의 기술주에 집중할 타이밍입니다. 저 역시 과거 환율 상승기에 겁먹고 팔았던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는 섣부른 손절보다는 섹터를 재편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물론 중간 선거가 있는 해는 역사적으로 변동성이 컸던 만큼, 일시적 조정에 대비한 현금 비중 관리도 함께 가져가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구조적으로 수출주에 유리한 환경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